르네 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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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르네 당주는 1409년에 태어나 1480년에 사망한 앙주 공작, 로렌 공작, 바르 공작, 그리고 나폴리 왕위 요구자였다. 그는 예술과 문화를 후원하며, 특히 앙주와 프로방스 지역의 발전에 기여했다. 르네는 부르고뉴와의 갈등, 나폴리 왕위 계승 분쟁, 백년 전쟁 등 격동의 시대를 겪었으며, 프랑스 왕실과의 협력을 통해 백년 전쟁 종결에 기여했다. 그는 문학, 회화,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사랑에 빠진 마음의 책'과 같은 작품을 남겼고, 바르텔레미 데이크를 후원했다. 르네는 앙주와 프로방스를 오가며 통치했고, 엑상프로방스, 타라스콩 등지에 그의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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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당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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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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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앙주 공 르네 |
이탈리아어 | Renato |
오크어 | Rainièr |
오크어 별칭 | Rei Rainièr lo Bòn |
프랑스어 별칭 | Le bon roi René (르 봉 루아 르네) |
작위 | |
나폴리 왕 | 1435년 2월 2일 – 1442년 6월 2일 |
앙주 공작, 프로방스 백작 | 1434년 11월 12일 – 1480년 7월 10일 |
로렌 공작 (여공작 이사벨 공동 통치) | 1431년 1월 25일 – 1453년 2월 28일 |
생애 | |
출생 | 1409년 1월 16일, 앙제 성, 앙주, 프랑스 왕국 |
사망 | 1480년 7월 10일 (71세), 엑상프로방스, 프로방스, 프랑스 |
매장지 | 앙제 대성당, 앙제 |
가문 | |
왕가 | 발루아-앙주 가문 |
아버지 | 루이 2세 당주 |
어머니 | 욜란다 데 아라곤 |
결혼 및 자녀 | |
배우자 | 이사벨 드 로렌 (1419년 결혼, 1453년 사별) 잔 드 라발 (1454년 결혼) |
자녀 | 장 2세 드 로렌 루이 당주 욜란다 당주 마르그리트 당주 |
계승 정보 | |
나폴리 왕위 계승 | 전임: 조반나 2세 디 나폴리 후임: 알폰소 1세 데 아라곤 |
앙주 공작, 프로방스 백작 계승 | 전임: 루이 3세 당주 후임: 샤를 5세 당주 |
로렌 공작 계승 | 전임: 샤를 2세 드 로렌 후임: 장 2세 드 로렌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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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wikitext
르네는 1409년 1월 16일 앙제 성에서 앙주 공작 루이 2세 나폴리 왕과 아라곤의 욜랑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마리의 동생이었는데, 마리는 미래의 샤를 7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루이 2세가 1417년에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은 매형인 샤를과 함께 어머니의 보호 아래 성장했다. 장남인 루이 3세는 시칠리아 왕위와 앙주 공작위를 계승했고, 르네는 기즈 백작이 되었다. 하지만, 1424년에 기즈는 부르고뉴파에게 빼앗겼다.
1419년, 르네는 이자벨, 로렌 공작 샤를 2세의 장녀와 법적으로 결혼했다. 당시 열 살에 불과했던 르네는 로렌에서 샤를 2세와 바르의 루이 추기경의 보호 아래 자랐는데, 두 사람 모두 부르고뉴파였지만, 앙주의 문장을 사용할 권리를 유지했다. 그는 부르고뉴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다. 1429년 랭스에서 프랑스 군대에 합류하여 샤를 7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바르의 루이가 1430년에 사망하자 르네는 바르 공작을 상속받았다. 이듬해, 장인의 죽음으로 그는 로렌 공작을 계승했다. 이 상속은 상속자인 앙투안에 의해 다투어졌고, 그는 부르고뉴의 도움을 받아 1431년 7월 불네빌에서 르네를 격파했다. 이자벨 공작 부인은 앙투안과 휴전을 맺었지만, 르네는 1432년 4월까지 부르고뉴의 포로로 남아 있었고, 그의 두 아들인 장과 루이를 인질로 넘겨주고 조건부로 석방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성장 배경
르네는 1409년 1월 16일 앙제 성에서 앙주 공작 루이 2세 나폴리 왕과 아라곤의 욜랑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마리의 동생이었는데, 마리는 미래의 샤를 7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루이 2세가 1417년에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은 매형인 샤를과 함께 어머니의 보호 아래 성장했다. 장남인 루이 3세는 시칠리아 왕위와 앙주 공작위를 계승했고, 르네는 기즈 백작이 되었다. 하지만, 1424년에 기즈는 부르고뉴파에게 빼앗겼다.
1419년, 르네는 이자벨, 로렌 공작 샤를 2세의 장녀와 법적으로 결혼했다. 당시 열 살에 불과했던 르네는 로렌에서 샤를 2세와 바르의 루이 추기경의 보호 아래 자랐는데, 두 사람 모두 부르고뉴파였지만, 앙주의 문장을 사용할 권리를 유지했다. 그는 부르고뉴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다. 1429년 랭스에서 프랑스 군대에 합류하여 샤를 7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바르의 루이가 1430년에 사망하자 르네는 바르 공작을 상속받았다. 이듬해, 장인의 죽음으로 그는 로렌 공작을 계승했다. 이 상속은 상속자인 앙투안에 의해 다투어졌고, 그는 부르고뉴의 도움을 받아 1431년 7월 불네빌에서 르네를 격파했다. 이자벨 공작 부인은 앙투안과 휴전을 맺었지만, 르네는 1432년 4월까지 부르고뉴의 포로로 남아 있었고, 그의 두 아들인 장과 루이를 인질로 넘겨주고 조건부로 석방되었다.
2. 2. 로렌 및 바르 공작 즉위와 부르고뉴와의 갈등
르네는 1420년 로렌 공작 샤를 2세의 딸 이자벨과 결혼하여 1431년 로렌 공작이 되었다. 결혼 당시, 장모이자 바르 공작이었던 루이 1세가 1430년에 사망하면서 르네는 바르 공작위도 계승했다. 그러나 로렌 공작위 계승은 부르고뉴파의 지원을 받는 앙투안과의 분쟁을 야기했고, 1431년 7월 뷜녜빌 전투에서 르네는 패배하여 선량공 필리프에게 포로로 잡혔다.르네는 디종에 여러 차례 억류되었다가 1437년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르네의 석방을 위해 샤를 7세는 대원수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선량공에게 파견하기도 했다. 르네는 어머니 욜란다의 바람대로 부르고뉴와 프랑스의 화해에 기여하여 1435년 아라스 조약 체결에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진다.
1433년 또는 1434년 바젤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에 의해 로렌 공작으로서의 르네의 작위가 승인되었다.
2. 3. 나폴리 왕위 계승 분쟁과 이탈리아 원정
르네는 1435년 나폴리 여왕 조반나 2세의 유언에 따라 나폴리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알폰소 5세가 이미 시칠리아 섬을 소유한 채 나폴리 왕국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르네는 알폰소 5세와 나폴리 왕위를 두고 경쟁하였으며, 1438년 5월, 나폴리에서 아라곤 군에 맞서 방어전을 펼치던 아내와 합류하여 1442년까지 아라곤 군대와 싸웠으나 패배하고 프랑스로 귀환하였다. 1441년 알폰소는 여섯 달 동안의 포위 끝에 나폴리를 함락시키고 약탈하였다.1453년, 르네는 다시 나폴리 원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비록 군사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나폴리의 풍경에 깊은 인상을 받은 르네는 귀국 후 프로방스의 마을 가르다네에 이탈리아의 꿈을 반영한 농원을 조성하였고, 이는 프로방스·이탈리아·플랑드르 문화 교류에 영향을 주었다.
2. 4. 프랑스 왕정과의 협력과 백년전쟁 종결
르네는 잔 다르크가 시농에 있는 샤를 7세에게 갈 때 동행했으며, 오를레앙 포위전 때 장인과 함께 로렌에서 오를레앙 방어 병사를 보냈다. 1429년 7월 17일 랭스 대성당에서 열린 샤를 7세 대관식에 참석하여 베드포드 공과의 맹세를 철회했다. 1429년 8월 몽테피요와의 전투에 참전했고, 9월 파리 포위전에서는 클레르몽 백작 샤를(후의 부르봉 공작샤를 1세)과 함께 잔 다르크가 이끄는 파리 포위군에게 샤를 7세의 철수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로렌 공작이 된 후 부르고뉴공작필리프 3세와 대립, 1431년 7월 2일 뷔르네빌 전투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샤를 7세는 르네를 석방하기 위해 대원수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필리프 3세에게 파견했고, 1437년 그의 노력으로 르네는 금 4000에큐로 석방되었다. 어머니는 부르고뉴와 프랑스의 화해를 원했고, 르네는 이에 응하여 필리프 3세와 협상, 1435년 아라스 조약으로 이어졌다고 여겨진다.
1444년 투르 조약 체결에 참여하여 잉글랜드와의 휴전에 기여했으며, 딸 마르그리트를 잉글랜드 왕 헨리 6세와 결혼시켜 양국 간 평화 관계 구축을 도모했다. 1449년 샤를 7세의 노르망디 원정에 참전하여 백년전쟁 종결에 기여했다.

2. 5. 프로방스 통치와 문화 후원
르네는 1453년 첫 번째 부인 이자벨 1세 드 로렌이 사망한 후, 로렌 공작위를 아들 장 2세 드 로렌에게 양위하였다.[7][8][9] 1454년 잔 드 라발과 재혼한 후에는 프로방스에서 여생을 보냈다. 엑상프로방스와 앙제를 중심으로 문학 살롱을 열고 예술가와 학자들을 후원하여 프로방스 지역의 독특한 예술 발전에 기여했다. 바르텔레미 데이크, 니콜라 프로망 등의 화가들을 지원했다.
르네는 루아르 강과 론 강 주변의 마을에 흔적을 남겼다. 타라스콩에서는 타라스크 축제를 시작하고 타라스콩 성을 개수하였으며, 마르세유에서는 자크 쾨르와의 교류와 도시 정비에 힘썼다. 아비뇽에는 르네의 저택이 현존한다. 엑상프로방스 미라보 거리에는 다비드 당제가 제작한 르네 조각상이 있는데, 왼손에 포도를 쥐고 경작을 장려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조경에 열중했던 르네는 엑스의 궁전 옆에 정원을 지어 여러 꽃과 채소를 심었다. 1454년 잔 드 라발과의 재혼 후 더욱 자연에 몰두하게 되었고, 1459년에는 레 보 드 프로방스를 잔에게 주어, 이곳에서 시, 음악 등 예술에 몰두하는 부부 생활을 보냈다.
막달라 마리아를 숭배했던 르네는 1447년에 생트 봄 산괴로 순례를 떠났으며, 1448년에는 생트 마리 드 라 메르에서 마리아 살로메와 마리아 야고베의 유골을 발굴하여 성유물함에 보관했다.
앙주에서는 프로방스보다 르네의 업적이 적지만, 타라스콩과 로렌과 함께 며칠에 걸친 기마 시합을 거행하고, 성사극 개최는 주로 앙주에서 행했다. 르네는 앙주에서 문예의 후원자, 산업 진흥가로 칭송받고 있다.
2. 6. 말년과 사망
1470년 아들 요한 2세가 사망하고 1473년에는 손자 니콜라 1세마저 사망하면서 르네 당주의 남계는 단절되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혈연 관계를 이용하여 르네의 영지를 노리기 시작했다. 르네는 1476년 루이 11세와 리옹에서 만나 영토 문제에 대해 양보했다.르네는 1474년 프로방스에서 은퇴하였고, 1480년 8월 10일 엑상프로방스에서 사망하여 앙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19세기 역사가들은 그에게 "선량공"이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4] 그는 왕실의 성 미카엘 기사단보다 먼저 초승달 기사단을 창설했지만, 이 기사단은 르네 사후 사라졌다.
르네는 유언을 통해 바르 공국을 외손자 르네 2세에게, 프로방스 백작령은 조카 샤를 5세에게 상속했다. 한편, 앙주 공국은 루이 11세에게 몰수되었다.
3. 통치와 유산
르네는 앙주와 프로방스를 수로와 육로를 통해 오갔으며, 루아르 강과 론 강 주변의 마을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언급할 타라스콩을 시작으로, 자크 쾨르와의 교류와 도시 정비에 힘쓴 마르세유, 르네의 저택이 현존하는 아비뇽을 들 수 있다. 특히 타라스콩과 엑상프로방스가 르네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엑상프로방스에는 미라보 거리에 왼손에 포도를 쥐고 경작을 장려하는 모습이 표현된 다비드 당제의 르네 조각상이 있다.
조경에 열중했던 르네는 엑스의 궁전 옆에 정원을 지어 여러 꽃과 채소를 심었다. 1454년 잔 드 라 발과의 재혼으로 더욱 자연에 몰두하게 되었고, 목가적인 생활을 좋아하는 후처의 영향도 받아 가르단에서 토지를 매입하여 농장 경영에 착수했으며, 풍차, 목장, 밭, 우물, 샘, 시냇물까지 파인 농장에 30명의 사용인, 포도, 복숭아 등 과일과 소, 돼지, 양 등 가축을 길렀다. 현존하지 않는 농장은 르네의 이탈리아에 대한 꿈을 반영하며, 엑스의 르네 조각상의 표현과도 연결되어 있다. 또한 1459년에 레 보 드 프로방스를 잔에게 주어, 이곳에서 시, 음악 등 예술에 몰두하는 부부 생활을 보냈다.
론 강변의 마을 타라스콩에는 르네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지명의 유래인 괴물 타라스크를 퇴치한 성 마르타의 전설과 그녀를 기린 성 마르타 교회가 유명하지만, 맞은편에 있는 타라스콩 성을 나폴리에서 데려온 장인들에게 개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한 것, 타라스크에 기인한 "타라스크 축제"를 시작한 것은 르네이다. 또한 막달라 마리아를 숭배했던 르네는 1447년에 생트 봄 산괴로 순례를 떠났으며, 1448년에 그녀와 함께 떠내려 왔다고 전해지는 마리아 살로메와 마리아 야고베의 유골을 생트 마리 드 라 메르에서 발굴, 8월에 발굴 작업을 완료하고, 11월에 조사 결과를 발표한 후 12월에 미사를 거행하여 유골을 성유물함에 보관한 다음, 발굴 장소이자 정비·개수된 생트 마리 교회 내 예배당에 두었다. 이렇게 유골은 생 미셸 상부 예배당에 보관되었지만, 프랑스 혁명 때인 1794년에 교회가 훼손되었고, 교회는 약탈당했지만 유골은 신자들이 미리 옮겨놓았기 때문에 화를 면했다.
한편, 앙주에서는 프로방스보다 르네의 업적이 적지만, 타라스콩과 로렌과 함께 며칠에 걸친 기마 시합을 거행하고, 성사극 개최는 주로 앙주에서 행하며, 유해는 프로방스에서 옮겨져 앙제에서 매장되는 등, 르네는 앙주에서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또한 그의 생활과 심정이 반영되어 앙제 성과 미술관에 있는 태피스트리, 다비드 당제의 미술관, 성의 정원에 심어진 포도나무 등, 르네가 사랑했던 목가적 풍경 및 예술에 대한 인간성에 대한 애착이 앙제에 "꽃과 예술의 도시"라고 칭해지는 기원을 만들었으며, 앙주에서 르네는 문예의 후원자, 산업 진흥가로 칭송받고 있다.
3. 1. 앙주 공국
르네는 백년 전쟁으로 황폐화된 앙주 지역 재건을 위해 힘썼다.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앙제 성을 중심으로 문화 예술 부흥을 이끌었다. 르네는 앙주와 프로방스를 수로와 육로를 통해 오갔으며, 루아르 강과 론 강 주변의 마을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조경에 열중했던 르네는 엑상프로방스의 궁전 옆에 정원을 지어 여러 꽃과 채소를 심었다. 1454년 잔 드 라 발과의 재혼으로 더욱 자연에 몰두하게 되었고, 목가적인 생활을 좋아하는 후처의 영향도 받아 농장 경영에 착수하기도 했다. 1459년에는 레 보 드 프로방스를 잔에게 주어, 이곳에서 시, 음악 등 예술에 몰두하는 부부 생활을 보냈다.
론 강변의 마을 타라스콩에는 르네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타라스콩 성을 나폴리에서 데려온 장인들에게 개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하였다. 막달라 마리아를 숭배했던 르네는 1447년에 생트 봄 산괴로 순례를 떠났으며, 1448년에는 마리아 살로메와 마리아 야고베의 유골을 생트 마리 드 라 메르에서 발굴하기도 했다.
앙주에서는 며칠에 걸친 기마 시합을 거행하고, 성사극 개최는 주로 앙주에서 행했으며, 유해는 프로방스에서 옮겨져 앙제에서 매장되는 등, 르네는 앙주에서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의 생활과 심정이 반영되어 앙제 성과 미술관에 있는 태피스트리, 다비드 당제의 미술관, 성의 정원에 심어진 포도나무 등, 르네가 사랑했던 목가적 풍경 및 예술에 대한 인간성에 대한 애착이 앙제에 "꽃과 예술의 도시"라고 칭해지는 기원을 만들었으며, 앙주에서 르네는 문예의 후원자, 산업 진흥가로 칭송받고 있다.
3. 2. 로렌 공국
르네는 부르고뉴 공국과의 갈등 속에서 로렌 공국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프랑스와 부르고뉴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추구했다.3. 3. 프로방스 백작령
르네는 앙주와 프로방스를 수로와 육로를 통해 오갔으며, 루아르 강과 론 강 주변의 마을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타라스콩을 시작으로, 자크 쾨르와의 교류와 도시 정비에 힘쓴 마르세유, 르네의 저택이 현존하는 아비뇽을 들 수 있다. 특히 타라스콩과 엑상프로방스는 르네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엑상프로방스에는 미라보 거리에 왼손에 포도를 쥐고 경작을 장려하는 모습이 표현된 다비드 당제의 르네 조각상이 있다.조경에 열중했던 르네는 엑스의 궁전 옆에 정원을 지어 여러 꽃과 채소를 심었다. 1454년 잔 드 라 발과의 재혼으로 더욱 자연에 몰두하게 되었고, 목가적인 생활을 좋아하는 후처의 영향도 받아 가르단에서 토지를 매입하여 농장 경영에 착수했으며, 풍차, 목장, 밭, 우물, 샘, 시냇물까지 파인 농장에 30명의 사용인, 포도, 복숭아 등 과일과 소, 돼지, 양 등 가축을 길렀다. 현존하지 않는 농장은 르네의 이탈리아에 대한 꿈을 반영하며, 엑스의 르네 조각상의 표현과도 연결되어 있다. 또한 1459년에 레 보 드 프로방스를 잔에게 주어, 이곳에서 시, 음악 등 예술에 몰두하는 부부 생활을 보냈다.
론 강변의 마을 타라스콩에는 르네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지명의 유래인 괴물 타라스크를 퇴치한 성 마르타의 전설과 그녀를 기린 성 마르타 교회가 유명하지만, 맞은편에 있는 타라스콩 성을 나폴리에서 데려온 장인들에게 개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한 것, 타라스크에 기인한 "타라스크 축제"를 시작한 것은 르네이다. 또한 막달라 마리아를 숭배했던 르네는 1447년에 생트 봄 산괴로 순례를 떠났으며, 1448년에 그녀와 함께 떠내려 왔다고 전해지는 마리아 살로메와 마리아 야고베의 유골을 생트 마리 드 라 메르에서 발굴, 8월에 발굴 작업을 완료하고, 11월에 조사 결과를 발표한 후 12월에 미사를 거행하여 유골을 성유물함에 보관한 다음, 발굴 장소이자 정비·개수된 생트 마리 교회 내 예배당에 두었다. 이렇게 유골은 생 미셸 상부 예배당에 보관되었지만, 프랑스 혁명 때인 1794년에 교회가 훼손되었고, 교회는 약탈당했지만 유골은 신자들이 미리 옮겨놓았기 때문에 화를 면했다.
4. 예술과 문화 후원
르네 당주는 엑상프로방스와 앙제에 문학 살롱을 열어 문인들을 지원했다. 또한, 직접 문학 작품을 창작했는데, 대표작으로는 '사랑에 빠진 마음의 책'(Le Livre du Cuer d'amours espris) (1457) 등이 있다. 이 작품은 《장미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사랑 풍자를 아서왕의 모험담과 결합시킨 것이다. 그는 오를레앙 공작 샤를과 시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는 기적극 공연을 장려하여 소뮈르에서 수난의 기적극을 하게 하였고, 앙제에서의 공연은 그의 원조하에 이루어졌다. 1462년 소뮈르에서 수난극 미스터리극을 공연했을 때 그 도시에 4년 치의 세금을 면제하기도 했다.
토너먼트 경기에 관한 책(Le Livre des tournois) (c. 1460년)은 중세 토너먼트의 규칙을 묘사하고 있으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소장 중인 필사본이 유명하다. 이 책은 종이에 수채화로 그려졌으며, 바르텔르미 데위크의 소묘작으로 알려져있다.
아마추어 화가로서 시칠리아 군주의 명성은 앙주와 프로방스의 많은 그림들을 그에게 낙관적인 속성을 형성하게 하였으며, 그의 후원과 지시에 의해 실행됐을 것이며, 조각, 그림, 금세공품, 태피스트리에도 그 화풍을 적용하도록 했을 것이다. 바르텔레미 데이크는 평생 동안 화가이자 ''varlet de chambre''로 고용되었다. 르네 당주는 그리스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카탈루냐어를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회화와 소설, 시를 제작하고 악기 연주, 작곡, 식물 재배에도 열심인 문화인이었다.
4. 1. 회화
르네 당주는 아마추어 화가로서 시칠리아 군주라는 명성을 얻었으며,[5][6] 앙주와 프로방스에서 그의 문장이 새겨진 많은 그림들이 그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긍정적인 귀속으로 이어졌다. 이 작품들은 보통 플랑드르 파 양식이며, 그의 후원과 지시하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조각, 회화, 금세공, 태피스트리 분야에서 미술 학교를 설립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평생 동안 바르텔레미 데이크를 화가이자 ''varlet de chambre''로 고용했다.바르텔레미 데이크는 플랑드르와 이탈리아 미술 교류에 관여했다. 1440년 이후 르네의 궁정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는 데이크는, 1444년의 엑스의 수태고지를 통해 북방 회화 양식을 프로방스에 전했다. 또한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예술가들의 인적, 작품 교류가 활발해지는 가운데, 데이크가 중개자 역할을 하며, 나폴리로 가서 화가 니콜로 안토니오 콜란토니오에게 북방 양식을 가르쳤다. 콜란토니오의 제자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작품 수태고지의 마리아도 엑스의 수태고지와 유사점이 발견되어 데이크의 작품을 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로방스의 화가들에게도 메시나의 반영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러한 점들에서 플랑드르, 프로방스, 이탈리아의 교류는 고리 모양을 이루며 서로 문화적 영향을 미쳤으며, 그것이 형성된 것은 데이크와 르네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특히 아비뇽에서는 니콜라 프로망의 후원자가 되었다. 1476년에 프로망은 삼면 제단화 불타는 덤불 제단화를 제작, 그림 주문과 성관의 장식과 문장을 다루는 등 르네가 매우 총애했다. 엑스 대성당(생 소뵈르 대성당)에 현존하는 제단화는 프로방스 회화를 대표하는 14세기 걸작 중 하나로 꼽히며, 구약 성경에서 모세가 불타는 덤불의 불꽃 속에서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일화를 바탕으로 한다. 중앙 패널에는 어린 예수를 안고 덤불 나무에 앉아 있는 성모 마리아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모세, 좌우 패널에는 각각 르네와 잔느 부부가 그려져 있다. 주변에는 타라스콘 성, 막달라 마리아 등 성인도 배치되어 있다.
르네는 15세기 유럽의 남북 모두 전환기를 맞이하여 예술 옹호에 힘썼다. 바르텔레미 데이크 등 예술가들을 다수 궁정에 불러들였으며, 화가 니콜라 프로망 등 궁정 밖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도 있었다. 르네의 만년에 엑스에서 예술가 40명, 계약 80건 이상, 마르세유에서 예술가 17명, 계약 48건, 아비뇽에서는 200명 이상이 관여했음이 밝혀졌다.
4. 2. 문학
르네 당주는 엑상프로방스와 앙제에 문학 살롱을 열어 문인들을 지원했다. 또한, 직접 문학 작품을 창작했는데, 대표작으로는 '사랑에 빠진 마음의 책'(Le Livre du Cuer d'amours espris) (1457) 등이 있다. 이 작품은 《장미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사랑 풍자를 아서왕의 모험담과 결합시킨 것이다. 그는 오를레앙 공작 샤를과 시를 주고받기도 했다.그는 기적극 공연을 장려하여 소뮈르에서 수난의 기적극을 하게 하였고, 앙제에서의 공연은 그의 원조하에 이루어졌다. 1462년 소뮈르에서 수난극 미스터리극을 공연했을 때 그 도시에 4년 치의 세금을 면제하기도 했다.
토너먼트 경기에 관한 책(Le Livre des tournois) (c. 1460년)은 중세 토너먼트의 규칙을 묘사하고 있으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소장 중인 필사본이 유명하다. 이 책은 종이에 수채화로 그려졌으며, 바르텔르미 데위크의 소묘작으로 알려져있다.
아마추어 화가로서 시칠리아 군주의 명성은 앙주와 프로방스의 많은 그림들을 그에게 낙관적인 속성을 형성하게 하였으며, 그의 후원과 지시에 의해 실행됐을 것이며, 조각, 그림, 금세공품, 태피스트리에도 그 화풍을 적용하도록 했을 것이다. 바르텔레미 데이크는 평생 동안 화가이자 ''varlet de chambre''로 고용되었다. 르네 당주는 그리스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카탈루냐어를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회화와 소설, 시를 제작하고 악기 연주, 작곡, 식물 재배에도 열심인 문화인이었다.
4. 3. 건축
르네 당주는 프로방스 지역의 건축물 정비에 힘썼다. 특히 타라스콩 성을 개축하였으며, 엑상프로방스에 정원을 조성하여 원예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아비뇽의 니콜라 프로망의 후원자였으며, 프로망은 1476년에 삼면 제단화인 불타는 가시덤불 제단화를 제작했다. 엑스 대성당(생 소뵈르 대성당)에 현존하는 이 제단화는 프로방스 회화를 대표하는 14세기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5. 르네 당주에 대한 평가
참조
[1]
문서
BN MS Fr 2695
[2]
간행물
Triboulet, Josseaume et Pathelin à la Cour de René d'Anjou
https://www.brepolso[...]
1980-01
[3]
웹사이트
Tate Gallery Website
http://www.tate.org.[...]
[4]
논문
The Sobriquets of Medieval European Princes
1978
[5]
인용
L'arte napoletana del Rinascimento
1925
[6]
인용
Renaissance Art Reconsidered: An Anthology of Primary Sources
2007
[7]
서적
Les bâtards de la Maison de France
Librairie Historique et Militaire
1901
[8]
서적
Les bâtards de la Maison de France
[9]
서적
Les bâtards de la Maison de France
[10]
서적
Le Grand livre de l'hérald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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